‌18-1번 암곡동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경주힐링테마파크 앞 두 갈래길 중에 포항방향 천북남로가 아닌 보덕로 들어서는 길 초입에서다.

보문단지가 화려한 리알토 다리가 놓인 카날 그란데라면 암곡동은 베네치아의 좁고 긴 골목을 통과하다 뜻밖에 들어선 내밀한 광장같은 아늑함이 있는 곳이다.
특히 이렇게 가을색 물들어 아름다운 날들엔 더욱 그러하다.

보문단지와 은밀하게 등을 맞댄 탓에 아는 사람만 알던 암곡동은 더이상 비밀스럽지 않다.
암곡동이 품은 무장산 덕분인데 무장산은 넉넉잡아 5시간 내외로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평이한 코스로
남녀노소 누구나 산행을 즐길 수 있는데다 바람따라 출렁이는 억새의 흰물결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기에 몇 년 전부터 가을 산행지로서 유명세가 대단하다.

결국 수많은 산행인파에 몸살을 앓던 암곡동은 가을 한철 차량이 통제되고 셔틀버스로만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유명세의 댓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즌 한정 셔틀버스가 다가왔다.
미리 준비해 둔 1300원을 경쾌하게 투척하고 가까운 창가자리를 찾아 앉았다.
계곡 모양 따라 구불구불한 국도를 리드미컬하게 달린 버스는 마침내 목적지이자 종점인 무장산 입구 정류장에 승객들을 쏟아내었다.

울긋불긋 단풍만큼이나 각색의 등산객들은 삼삼오오 무장산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무장산향 인파의 흐름을 벗어나 미리 보아둔 샛길로 빠졌다.
그리고 지도앱을 통해 현재 내 위치가 도투락 목장 가는 길로 알맞게 들어섰음을 재차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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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꼬깔콘으로 차단된 길을 따라 오르면 곧장 도투락목장 가는 길이다.

표식 이후는 태영건설 사유지로서 관계자 외 출입을 제한하고 묘지 조성 및 산지훼손시 고발 조치하겠다는 엄중한 경고문구가 눈을 부라렸지만,
나는 사유재산 침해목적이 아닌 관계로 계속 진행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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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 한 차례 걸러낸 빛망울이 땅 아래 맻혀 찰랑거리고 세멘 포장길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후에야 비로소 탁 트인 하늘을 보여주었다.

해발 고도 400미터에 올라서니 암곡동 너머 보문방향 조망이 시원하다. 무장산과 어깨를 맞댄 주변 산세의 산그리메가 참으로 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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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 한대 지날만한 임도는 들판을 지나 숲길로 나를 인도했다.

새 지저귀고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숲의 소리에 자연스럽게 귀를 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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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의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육중한 바위와 다분한 고의로 깊게 판 골을 마주하였다.

제 아무리 4륜 구동이라도 지나지 못할 튼실한 바리케이트다.

도투락 목장 검색어에 연결되어 보여지던 진흙 잔뜩 묻은 오프로더와 산악바이크 동호인들의 인증사진들이 떠올랐다.

초입에 보았던 경고문구를 잠시 떠올리며 한결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바리케이트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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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 패여진 불친절한 대문을 지나면 길의 끝에 나지막히 엎드린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가 바로 도투락 목장 폐축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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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도투락목장은 7~80년대 (주)도투락의 우유 생산지인 방목장이었다.
도투락은 경주가 고향인 내게 도투락 월드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근하다.

주식회사 도투락은 특유의 고소한 맛이 선명한 도투락 우유를 비롯해 고향만두, 빙과류 등 다양한 냉동식품을 생산하던 기업이었으며,
모그룹인 봉명산업은 한때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계열사로 거느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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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라 선후는 명확치 않으나,

90년대 접어들며 봉명산업은 자금난을 겪으며 여러 계열사들을 매각했고

도투락우유는 남양유업에 그리고 도투락목장 부지는 태영건설에 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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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산에 위치한 200만 평 규모의 도투락목장은 경주 상수원의 수질보호를 위해 폐쇄되었다고 한다.

결국 봉명산업과 도투락은 1993년에 부도났고
도투락은 그 이후 기업회생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2004년 만두파동으로 또 한번 타격을 입고 현재는 건강식품 다단계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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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쭉한 축사동은 하나같이 답답한 지붕을 풀어헤치고 한없이 푸른 하늘을 품었다.

한때 사육시설, 착유실로 사용되던 건물들은 견고한 콘크리트 뼈대만이 시간의 풍화를 온전히 견뎌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뒹구는 유가공 물품과 페인트 글씨만이 한때 여기가 목장이었음을 귀띔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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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붉은 담쟁이가 멋스럽게 장식된 축사동 한 곳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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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하였다.

맨 앞 기둥에 협박조로 쓰여진 ‘전염’이라는 선혈색의 두 글자를 마주하는 순간
따스하기만 하던 가을의 색온도는 급격히 냉각됨을 느꼈다.

바이오하자드 같은 좀비물에나 나올 법한 오싹한 풍경에 몇 컷 깔짝거리다 말고 도망치듯 바깥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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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동 안쪽 낮은 언덕길을 오르면 지붕이 높은 건물과 화물 로딩데크와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나타난다.

 아마도 아래 축사동에서 착유한 원유를 1차 가공하고 출하를 위해 잠시 보관하던 창고였으리라.

타임스톤이라도 가진 것 마냥 장소가 기억하는 그 시절 질서정연한 풍경과 일터에서 분주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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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슬슬 내려가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하산코스는 너른 초원을 둘로 가르며 뻗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간다.

올라왔던 길과 달리 산 둘레를 그러안듯 빙 둘러 내려오는 길이지만 경사가 급하지 않아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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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면 길 오른편으로 공동주택 몇 채가 나타나는데,
냄새 고약한 축사와 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목장 직원들의 숙소가 아닐까 한다.

힘든 목장일 후에 따뜻한 물로 고된 하루의 땀을 씻어내고, 마루 끝에 앉아 빛나는 별빛에 곁들이는 맥주 한잔.

목장의 밤은 동해의 깊은 물만큼이나 짙고 푸르렀으리라.


아름답던 시간을 뒤로 한 채, 이제는 숙소와 연결된 전깃줄 몇 가닥만이 야생화 들판 위로 힘없이 축 늘어져 있을 뿐이다.